자본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만든 스타: 리센느의 역주행



대형 기획사 없이 차트 정상 근처까지


K팝 산업은 오랫동안 '자본 게임'으로 여겨져 왔다. 대형 기획사가 막대한 제작비를 투입해야 성공 가능성이 생긴다는 인식이 강했다. 그런데 2026년 상반기, 그 통념을 흔든 사례가 나왔다. 신생 중소 기획사 더뮤즈 엔터테인먼트 소속 5인조 걸그룹 리센느(RESCENE)다. 2024년 8월 나온 미니 1집 타이틀곡 'LOVE ATTACK'이 발매 약 2년 만에 두 차례 역주행(발매 당시엔 주목받지 못하다가 시간이 지나 뒤늦게 인기를 얻는 현상)을 거쳐, 6월 30일 기준 멜론 TOP100 5위까지 올라섰다. 멜론 데이터랩은 이 흐름을 근거로 리센느를 2026년 상반기 대표 아티스트로 꼽았다.





묻혀 있던 2년


화려한 역주행 뒤에는 조용한 시간이 있었다. 리센느는 2024년 3월 데뷔 이후, 큰 주목 없이도 라이브 방송과 소소한 활동을 꾸준히 이어왔다. 이 시기를 기획한 건 더뮤즈 엔터테인먼트의 윤성원 PD였다고 알려져 있는데, 특히 멤버 원이의 개인기와 캐릭터성을 눈여겨보고 유튜브 채널 운영을 밀어붙인 것으로 전해진다. 처음부터 큰 반응이 온 건 아니었다. 2026년 2월이 돼서야, 원이가 고향 거제를 언급하며 남긴 '거제 야호'라는 한마디가 알고리즘을 타기 시작했다.







밈 하나가 지자체 행정까지 움직이다


이 흐름이 흥미로운 건, 온라인 밈이 오프라인 행정으로까지 번졌다는 점이다. 5월 초부터 커뮤니티 전반에 폭발적인 반응이 이어지더니, 거제시는 리센느를 데뷔 후 첫 지자체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위촉 발표 영상에서는 거제시 공무원들이 직접 "거제 야호"를 외치기도 했다. 이후 멤버 리브의 고향 수원시, 제나의 고향 경주시도 잇따라 홍보대사 위촉에 나섰다. 팬들 사이에서는 과거 활동 영상을 다시 찾아보는 흐름도 생겼다. 무명 시절의 노력이 뒤늦게 재조명되면서, 팬덤이 오히려 더 단단해지는 모습이었다.





왜 하필 '언더독'에 반응했을까


이 현상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콘텐츠도 나왔다. 펜실베이니아 주립대 샘 리처드 교수가 자신의 유튜브 강의에서 리센느의 역주행을 '언더독(underdog, 이길 확률이 낮다고 여겨지는 약자) 효과'로 풀어낸 것이다. 그는 리센느를 '고래들 사이의 새우'에 비유하면서, 한국 특유의 정서인 '한(恨)'— 억눌린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실력으로 증명해내려는 조용한 결의 — 이 이런 서사에 대중이 반응하게 만든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언더독을 향한 응원이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라는 점도 짚었다. 미국은 자수성가한 영웅에게, 영국은 공정한 기회에, 일본은 결과보다 도전 자체에 가치를 두는 방식으로 각자 언더독 서사에 반응한다는 것이다. 완벽하게 세팅된 모습만 강조하는 최근 K팝 시장의 흐름에 대중이 다소 피로감을 느끼던 차에, 자본 없이 버텨온 리센느의 이야기가 오히려 인간적으로 다가왔다는 해석도 여기서 나온다.





밈을 넘어서려는 다음 걸음


밈으로 시작된 관심이 오래갈지는 그룹 스스로도 고민하는 지점인 듯하다. '갸루' 콘셉트로 화제를 모았던 멤버 미나미는 최근 이 콘셉트를 중단하겠다고 밝히며, 단발성 화제를 넘어 아티스트 본연의 실력으로 평가받겠다는 방향을 택했다. 밈이 만들어준 관심을 실력으로 붙잡아두려는 시도로 읽힌다.





알고리즘이 바꾼 성공의 조건


리센느의 사례가 보여주는 건, 성공 공식이 더는 초기 제작비 규모와 비례하지만은 않는다는 사실이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우연히 조명한 콘텐츠 하나가 2년 전 발매곡을 다시 차트 위로 끌어올릴 수 있는 시대가 됐다. 이게 운이 좋았던 한 번의 사례일지, 중소 기획사에게도 통하는 새로운 경로가 열린 것인지는 좀 더 지켜볼 문제다. 다만 적어도 이번만큼은, 자본이 아니라 알고리즘과 진정성 있는 서사가 스타를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사례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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